적막한 숲에 홀로 들어서면 그저 바람이 숲을 일렁이는 소리를 듣게 된다. 나무와 나무가 비정형으로 부딪히며 내는 바람의 소리는 정교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그 소리에 잠시 머물며 '바람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무는 바람을 좋아한다. 나무들은 발이 땅에 묶여 바람이 불 때 잠시나마 몸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몸을 움직이면 땅과 뿌리 사이에 빈틈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그 틈 사이로 나무는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땅 속 깊숙한 곳에서 뿌리들이 서로 연결되면 나무들의 대화가 시작된다. 뿌리와 뿌리가 대화하는 장면이라니. 상상해 보면 신비하다. 그런데 이건 상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실제 그렇다고 한다.
바람의 말이 있었다.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 말이다. 아득히 먼 옛날, 초원에 천막 하나 치고 우주를 집 삼아 살던 유목민들은 바람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삶의 목적을 향해 긴 여정을 떠났던 초원의 방랑자들은 그들의 여정을 깃발에 적어 매달았다. 오색의 깃발에 기록된 이야기는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 들을 수 있는 이, 들으려는 자들에게는 바람의 말이 들려왔다. 오늘날 이야기는 바람보다 빨리 전해진다. 덕분에 사막에 가지 않아도 신기루를 볼 수 있고, 흙을 밟지 않고도 생명을 말하게 되었다. 말은 많아졌지만 '바람의 말'은 사라졌다. 나의 외갓집은 낙동강 가에 위치해 있었다. 장마 때 강수량이 많아지면 어김없이 강은 범람해 농지나 가옥을 집어 삼키곤 했지만 범람했던 물이 지나간 자리에는 모래밭과 비옥한 땅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을 굳이 생각지 않아도 됐던 어릴 적 나는 뜨거운 모래밭에서 뛰놀던 기억만 간직할 수 있었다. 4대강 개발정책이 추진될 즈음에 지율스님과 함께 낙동강 내성천을 걸었던 적이 있다. 한 겨울, 차가운 모래를 맨발로 밟으며 뜨거운 모래밭과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나에게 강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기억을 더 이상 일상으로 복원할 수 없음을 의미했기에 그 행위는 일종의 애도였다.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강모래를 밟을 수 없게 되었다.
이반 일리치는 『H2O와 망각의 강』이라는 책을 통해 이제는 사라진 물의 꿈에 대해 말한다. 죽은 이의 발에서 기억을 씻어주는 레테의 강물과, 그 기억을 강물에서 길어내 시인에게 전해주는 므네모시네의 샘을 말이다. 인간의 풍부한 상상력과 꿈을 반영했던 질료였던 물이 교환가치이자 희소자원인 H2O로 획일화되면서 우리는 변기의 물과 호수물의 차이도, 시냇물과 분수물의 차이도, 자연의 불과 핵발전의 불 사이도 분간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어릴적 두 발을 담갔던 물은 분명 H2O가 아닐텐데, 지금 우리는 물의 꿈을 기억해 낼 수 있을까.
바람처럼 물처럼은 바람의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었고, 물의 꿈을 기억할 수 없게 된 우리네들에 대한 위로이자, 아무도 듣지 않으려는 바람의 말,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물의 꿈을 복원하고 싶은 바램이다. 매거진 <바람과 물>은 그 힌트를 제공할 것이고, E-레터 <바람처럼, 물처럼>은 그 답을 스스로 찾아나가는 사람들의 긴 여정이다. 아무쪼록 위기를 위기라 인식하고 변화를 모색하는 이들이 더 이상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도록 이야기가 힘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