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 서울과기대 문예창작과 교수, 시인, 『그곳이 멀지 않다』 외

사원소론과 흙의 상상력

엠페도클레스를 비롯한 고대 철학자들은 만물의 원리를 탐구하며 흙, 공기, 불, 물을 기본원소로 꼽았다. 철학자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긴 했지만 사원소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물이 생성되고 세계가 변화한다고 본 것은 공통적이었다. 예를 들어,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만물의 원리로 보면서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 되고, 공기가 응축하면 흙과 물 같은 물질이 된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사원소론을 바탕으로 온溫과 냉冷, 건乾과 습濕의 대조적인 감각 성질에 따라 우주론을 체계화했다. 현대에 와서 사원소를 바탕으로 시학과 상상력 이론을 펼친 것은 가스통 바슐라르였다. 그는 사원소를 ‘상상력의 호르몬’이라고까지 불렀다. 『불의 정신분석』 『물과 꿈』 『공기와 꿈』 『촛불의 미학』 『대지 그리고 의지의 몽상』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등은 사원소를 질료로 삼아 물질적 상상력을 탐구한 저작들이다. 과학철학자였던 바슐라르가 상상력 이론과 시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강의실에서 만난 한 학생의 질문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자신이 연구해온 분야가 살균된 세계였음을 깨닫고, 미생물이 들끓는 생명의 세계 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와 상상력의 세계였다.

과학교육에서 철학교육으로 옮겨왔건만, 나는 완전히 행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불만족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지요. 어느 날 디종에서 한 학생이 ‘나의 살균된 세계’를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건 하나의 계시였어요. 사람은 살균된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세계에 생명을 이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미생물, 세균들을 들끓게 해야 했습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했던 거지요.

이성 중심의 서구 문명과 과학적 세계관에 맞서 그는 이미지와 상상력의 중요성과 가치를 옹호하며 다채로운 몽상을 펼쳐 보였다. 특히 ‘흙’을 몽상의 질료로 삼은 『대지 그리고 의지의 몽상』과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 은 ‘의지’를 통해 물질의 적대성(외향화)을, ‘휴식’을 통해 물질의 내밀성(내향화)을 보여주는 ‘흙의 시학’이다. ‘흙’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물들을 감추고 또한 드러내는 데 아주 적절한 원소”라는 코스모폴리트의 말처럼 양가성을 지닌 질료라고 할 수 있다. 바슐라르가 두 권의 책으로 따로 집필하기는 했지만, 흙을 둘러싼 상상력에 있어서 외향성과 내향성 또는 능동성과 수동성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이미지는 그 양극 사이를 오가며 변증적으로 전개된다. 『대지 그리고 휴식의 몽상』에서 바슐라르가 분석한 집, 배腹, 동굴, 미궁, 뱀, 뿌리, 포도나무 등의 문학 이미지들도 대지의 역동성과 내밀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바슐라르의 후계자이자 비판자인 질베르 뒤랑은 사원소 외에도 ‘눈雪’이라는 물질을 예로 들면서 사원소론만으로는 인간이 지각하는 물질적 실재를 온전히 망라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인류학자였던 뒤랑은 마니교에 나타난 십원소—빛, 부드러운 기운, 바람, 물, 불/연기, 화마火魔, 폭풍, 흙탕물, 어둠—나 중국의 오원소—五行: 水, 火 , 木 , 金, 土—를 거론하면서 사원소론이 서구 중심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원소론에 기반한 이미지와 상징체계를 해체하고, 시뿐 아니라 예술, 종교, 인류학에 나타난 이미지들을 아울러 『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을 완성했다. 이 책은 이미지를 낮의 체계와 밤의 체계로 구분하고, 이를 분열형태구조, 신비구조, 종합구조로 설명한다. ‘흙’에 대한 부분은 밤의 체제 1부인 ‘하강과 잔盞’에 주로 나온다. 본문 앞에 『도덕경』의 구절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신비스러운 암컷이라고 부른다”가 인용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그러면서 동양의 ‘곡신谷神’과 서양의 다양한 여신들이 나란히 호명되고 있는데, “아스타르테, 이시스, 데아 시리아, 마야, 마리카, 마그나 마테르, 아나이티스, 아프로디테, 키벨레, 레아, 게, 데메테르, 미리암, 찰치우틀리쿠에, 서왕모” 등이 그 이름들이다. 제임스 러브록이 제시한 가이아 이론의 ‘가이아’ 역시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의 이름이다. “때로는 우리를 땅으로 이끌거나 때로는 물가로 이끌면서 언제나 돌아감과 회한을 불러일으키는 상징”인 ‘위대한 어머니’는 대지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뒤랑은 매장과 관련된 제의와 장소로서 무덤이나 동굴과 관련된 신화와 예술을 분석하면서 바슐라르의 논의를 확장한다. 여기서 대지와 밤의 여신은 낮의 체제가 지니지 못한 ‘휴식과 깊이’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문명권의 시와 제의, 신화와 원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류의 동일성과 보편성을 해명하려고 한 뒤랑은 상상계를 체계화할 수 있다는 모순적 작업을 감행했다.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생물학에서 찾음으로써 대립적으로만 여겨졌던 과학과 시학을 통합했다는 점에서 바슐라르의 이원론을 극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가스통 바슐라르와 질베르 뒤랑을 포함해 구스타프 융, 새뮤얼 콜리지, 장 폴 사르트르 등의 상상력 이론을 지금의 상황과 관점에서 읽어보면 인간 중심주의적 보편주의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들은 개념과 이성 중심의 서구 문명에 대해 이미지와 상상력의 가치를 옹호하고 복원했다는 점에서 기여한 바가 크다. 하지만 고전적인 상상력 이론이 디지털 기술문명이나 자본주의사회가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는 오늘날 얼마나 유효한 분석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속에 내재한 플라톤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더욱이 가속화되는 환경오염과 기후위기 시대에 ‘인간문화’의 원형을 밝히는 일 못지않게 ‘자연문화’의 일부로서 인간의 위치와 역할을 성찰하는 일은 매우 긴급한 과제라고 여겨진다. 오늘날 물, 불, 공기, 흙, 모두가 자연의 순환적 질서와 상징적 의미를 급속히 잃어가고 있다. 이제 흙은 더 이상 ‘어머니 대지’의 풍요로움을 나타내는 상징이 될 수 없고, 휴식과 깊이의 몽상을 가능하게 하는 질료가 되지 못한다. ‘흙의 시학’ 역시 흙을 전 지구적 문명의위기를 대변하는 ‘물질’로 바라보고 생태적 회복을 모색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21세기의 흙과 생명의 감각

그렇다면 21세기의 흙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2016년 《사이언스Science》에는 얼 엘리스Erle Ellis를 비롯한 연구진이 그린란드 빙하 지역의 퇴적물 단면을 시각화하고 그 성분을 분석한 논문이 실렸다. 그 퇴적물에는 “기후변화로 빙하가 녹으면서 이끼 등 유기 조직물이 빙하 위를 덮고 그 아래 흙,유기물과 뒤섞인 플라스틱 찌꺼기, 콘크리트 잔해, 혼합시멘트, 핵물질, 살충제, 금속 성분, 바다로 유입된 비료 반응성 질소N2, 온실가스 농축 효과의 부산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구온난화로 일어난 지질층의 변화를 보여주는 이 퇴적물은 인류세 시대 기후위기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고 할 만하다. 또한 지구의 지형학적 변화과정을 연구해온 지질학자 데이비드 몽고메리는 『흙』이라는 책을 통해 흙의 침식이 생태계와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농경이 시작된 이래 인간의 문명은 흙을 잃어가고 고갈시킨 대가로 성장해왔다고 말했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사라지는 흙은 240억 톤”에 이르는데, 사람들은 그 침식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흙의 생성보다 침식이 훨씬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고, 지구의 얇은 토양 맨틀soil mantle이 지금의 속도로 침식된다면 몇 세기에 걸쳐 축적된 흙이 10년도 안 되어 사라질 수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인간이 하루하루 ‘지구의 살갗’을 벗겨내고 있는 것이다. 토양 침식의 주요 원인으로는 숲의 훼손, 플랜테이션 농업의 경작방식과 농기계, 석유에 의존한 화학비료와 살충제의 사용 등을 들 수 있다. 경작할 수 있는 땅은 갈수록 줄어들고 석유도 고갈되어가는 현실에서 이런 식의 산업농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소농의 육성과 유기농업이 흙의 비옥함을 유지할 수 있는 대안이지만, 늘어나는 인구에 따라 수확량을 확보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몽고메리는 농업방식의 전환과 함께 토지윤리, 슬로푸드, 지역 농산물 먹기 운동 등을 제안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법론 못지않게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흙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다. 『흙』의 원제는 ‘dirt’인데, 여기엔 우리가 흙을 ‘dirt’처럼 더럽고 하찮은 것 또는 쓰레기로 여겨온 것은 아닌지 하는 반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오늘날 흙을 보존하려는 노력들은 고대사회가 그랬듯이 너무 미약하거나 너무 늦은 것일까? 또 우리는 농지의 흙을 보존하면서도 더욱더 집약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게 될 것인가? 우리 문명의 수명을 연장하려면 흙을 산업 공정의 투입물로 보지 말고 물질적 부를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토대로서 존중하도록 농업을 재편성해야 한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문명의 생존은 흙을 투자 대상이나 상품이 아니라 소중한 유산으로, 하찮고 더럽지 않은 어떤 것으로 대하는 데 달려 있다.

이처럼 현대인은 땅을 투기 대상이나 상품으로 소유하려고 들지만, 그 땅을 이루고 있는 흙에 대해서는 더럽고 비위생적인 물질로 여기는 이중적 태도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생존이 흙에 얼마나 기대고 있고 흙 속에 얼마나 다양한 유기체들이 깃들어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흙은 식물과 동물, 미생물들이 공존하며 생명의 순환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터전이자, 썩은 물질을 정화하고 새로운 양분을 만들어내는 필터 역할을 해왔다. 몇 센티미터의 비옥한 흙이 만들어지는 데는 천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흙에 깃들어 있는 생명의 역사와 생물 다양성을 살아 있는 감각으로 느끼기에는 우리가 뒤집어쓰고 있는 문명과 자본의 외투가 너무 두껍기만 하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5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이 실은 수십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_정현종, 「한 숟가락 흙 속에」 전문

시인은 아스팔트가 아니라 흙길을 맨발로 밟으며 발바닥에 실려오는 흙의 탄력성에 감탄한다. 그 생명력은 한 숟가락의 흙 속에 들어 있는 1억 5천만 마리의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힘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흙 한 술”은 “삼천대천세계”로 확장된다. 21세기의 흙이 플라스틱과 콘크리트와 핵물질과 화학성분이 퇴적된 채 병들어간다 할지라도, 이렇게 남아 있는 흙의 생명력을 노래하는 일은 여전히 시인에게 주어진 권리이자 책무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시에서 정현종 시인은 이렇게 탄식하기도 한다.

가을 햇볕에 공기에 익는 벼에 눈부신 것 천지인데, 그런데, 아, 들판이 적막하다— 메뚜기가 없다! 오 이 불길한 고요— 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느니…… _정현종, 「들판이 적막하다」 전문

이 시를 읽으니, 화학비료나 살충제에 의해 1,082종의 메뚜기 중 25퍼센트 이상이 멸종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떠오른다. 흙이 오염되면서 메뚜기뿐 아니라 들판에 깃들어 살아가는 수많은 생물종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맑은 가을날 들판을 지나며 시인은 문득 “불길한 고요”를 느낀다. 예전에 지천으로 보이던 “메뚜기가 없다”는 사실의 자각은 “생명의 황금 고리가 끊어졌”다는 인식으로 나아간다. 앞의 시에서 흙의 생명력에 감탄하는 모습과 이 시에서 파괴된 생태계에 대해 탄식하는 모습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만큼 시인의 감각이 생명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작은 현상을 통해서도 전체적 연결고리를 읽어내고 있다는 증표일 것이다. 이처럼 현대 시인은 대지의 남아 있는 생명력과 유기적 질서를 노래하는 한편, 오염되고 파괴된 자연에 대한 고통스러운 증언자이자 고발자 역할을 해왔다.

흙의 마음과 시의 마음

현대에 이르러 흙은 인간의 삶과 너무나 멀어졌고 비천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일찍이 인간이 흙에서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성서에서 하느님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호모homo’가 살아 있는 흙을 뜻하는 ‘후무스humus’에서 왔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오늘날 인간의 불행이나 소외는 우리 존재가 흙에서 왔으며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데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저는 사람은 본래 흙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면 흙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것도 틀림없다고 봅니다. 어떤 책에서, 어느 땐가 몹시 불안하고 마음이 편치 않았을 때 우연히 흙을 만지작거렸더니 어느새 마음이 평온해지는 경험이 이야기되고 있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런 일은 실제로 사람의 존재가 흙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을 떠나서는 설명이 안 될 겁니다. 우리는 시가 제공하는 감동을 제대로 수용하려면 우리 자신이 흙이나 자연 또는 우주와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에 철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김종철은 이러한 생태적 깨달음이 살아 있는 감수성으로 작용할 때만 진정한 것이 된다고 강조한다. 환경문제가 심각해졌다는 사실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 느끼고 감수성의 변화로까지 이어져야 이 사태를 극복할 수 있는 의식과 행동의 변화도 생긴다는 것이다. 생태적 감수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시적 상상력과 사유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시적 사유의 본질에는 어떠한 인공적인 조작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세계의 근원적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대한 본능적 인식이 내재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동의어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내가 시인으로서 살아온 여정을 ‘흙’과 관련해 잠시 돌아보게 된다. 의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등단작 「뿌리에게」라는 시부터 ‘흙’은 내 시의 화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학교 2학년 학기 초였던가. 늦겨울 학교 뒷산에 올라갔다가 김을 내뿜으며 녹기 시작하는 흙의 생명력에 감전되어 이 시를 순식간에 써내려갔다. 내 속의 흙이 얼음에서 풀려나며 말하는 소리를 받아 적은 것이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아, 나의 사랑을”로 시작하는 시를. 그때만 해도 흙의 충만한 사랑과 생명력이 내 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흙’은 점점 말라 푸석해지고 더 이상 생명을 키워낼 수 없도록 척박해져갔다. 그 불모성은 훼손되어가는 자연의 실제적인 상태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세상에 부딪치고 상처 입으면서 갖게 된 내면적 상태이기도 하다. 「뿌리로부터」라는 시에서는 나를 지탱해주던 대지적 기반으로부터 벗어나 더 희박한 허공으로 탈주하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뿌리를 향하던 마음이 뿌리로부터 벗어나 더 위태로운 실존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새로운 시의 자리를 찾는 길이라 여겼던 듯하다.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나는 이미 ‘연한 흙’이 아니라 뿌리에서 가장 멀리 도망치며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지난 30여 년 동안 나의 시는 과연 흙의 마음에서 멀어진 것일까. 다시 생각해보니, 그 내면적 불모화의 과정은 지구의 흙이 온통 파헤쳐지고 착취당하고 온갖 오염물질들로 끙끙 앓아온 과정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나의 내면과 시가 병든 흙과 함께 앓아왔던 것 같다. 세계가 깊이 병들어가는데 변함없이 아름다운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를 쓴다는 것이 오히려 더 기이하지 않은가. 2000년대 이후 한국 시가 겪은 변화를 떠올려보아도 그렇다. 많은 시인들이 자연이라는 매트릭스에 안주하지 않고 서정적 주체로서 군림하지 않으며 ‘다른 서정시’를 향해 부단히 움직여왔다. 자연과의 낭만적 동일화를 넘어서 파괴되고 오염된 세계의 실상을 직시하고 증언하는 시들이 발표되었다. 그 시들은 상실의 고통 속에서 부르는 비가悲歌이자, 죽거나 희생된 존재들을 애도하는 만가挽歌였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하데스에게 딸을 빼앗기고 스스로 불모의 땅이 되어 불렀던 슬픔의 노래였다. 시는 순하고 부드러운 흙에서 태어났으나 더러워지고 병들어가는 흙 속에서도 끝내 그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다. 흙의 마음이 곧 시의 마음이기에.